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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TWO CHAIRS웹진 51] 신인류, 덕후의 세계

by nutrient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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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류, 덕후의 세계


덕후의 탄생

이제는 우리에게 꽤 친숙해진 단어 ‘덕후’. 이 말은 일본어 ‘오타쿠(Otaku)’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1970년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 의미나 뉘앙스가 많이 달라졌지만, 오타쿠라는 말이 처음 생겼을 때만 해도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주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게임 등을 좋아해서 소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그들이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결여된 이미지가 강한 것은 물론 외곬으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부
분은 무능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내성적인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 부정적이던 이 단어가 1990년이 되
면서 조금씩 새로운 의미로 변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덕후들이 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덕후, 새로운 의미를 얻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덕후라는 말은 사회성 결여, 무능, 내성적이라는 부정적 느낌보다는 한 가지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에 몰두해서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인식되기 시작
했다. 같은 단어가 이렇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데에는 기존에 우리가 오타쿠 혹은 덕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새
로운 모습을 보여준 덕분이다. 일의 도피처, 애정 하는 취미쯤으로만 여겼던 ‘덕질’이 성공적인 커리어로 이어진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야말로 ‘덕업 일치, 성덕’이다. 한 우물을 파는 데 시간과 돈, 온 마음을 쏟아부은 덕후가 그 ‘덕력’을 활용해 업을 삼는 건 아마도 세상 모두가 원하는 바일 터. 그런데 덕질의 영향력은 다양한 방면으로 뻗어나간다. 덕질로 전도유망한 스타트업 브랜드가 만들어지고, 단숨에 톱 연예인을 탄생시키며, 세상에서 사라졌던 상품을 부활시키기도 한다. 일명 팬슈머(Fansumer)다. 억척과 극성이 이들의 미덕이다. ‘뭘 그렇게까지?’라는 제한선은 없다. 얄팍한 마케팅에 넘어가 소비당하는 대신 확실한 취향이 있고, 그에 맞게 주체적으로 소비한다. 수동적으로 소비만 하던 이들에게도 능동적 소비를 촉구하며, 뭐든 가능하다고 말한다. 덕후가 시작한 덕질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덕후가 탄생시킨 마케팅, 팬슈머

팬슈머는 팬(Fan)과 컨슈머(Consumer)의 합성어로, 한 대상을 향해 일방적으로 애정을 쏟고 구매하는 덕후의 모습에 그치지 않고 기획하고 투자하고 견제하는 상호작용에 방점을 두는, 매우 적극적인 팬으로서 소비자를 말한다. 특정 브랜드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좋아하는 덕후가 되는 것은 기본이고, 이 애정과 관심을 바탕으로 생산과 홍보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간섭과 비판 역시 마다하지 않기에 이들은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무척 높다. 팬슈머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기업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영국의 뷰티 브랜드 ‘러쉬’다. 러쉬는 자연을 생각하는 자연 친화적인 기업이다. 자연에서 얻은 안전한 원료를 고집하고, 최소한의 포장과 보존제를 사용하는 깐깐한 철칙을 고수하고 있다. 러쉬는 다채로운 캠페인 활동을 전개해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 철학을 알리고 있는데, 그 중심에 러쉬의 브랜드 앰배서더가 있다. 바로 질투 날 정도로 러쉬스러운 소비자를 뜻하는 ‘젤러쉬(질투를 의미하는 ‘Jealousy’와 브랜드명 ‘러쉬’의 합성어)’에도 “러쉬에 대한 애정이 깊고, 환경과 동물을 사랑하고, 텀블러와 낫랩(Knot Wrap; 보자기 포장)을 즐겨 사용하는 자”라는 조건을 내걸고 뽑을 정도인데, 이렇게 선발된 소비자들은 불필요한 포장 쓰레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고 네이키드(GoNaked)’ 캠페인 등을 알리며 지구 보호에 앞장선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브랜드와 연대하며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런 소통 과정을 통해 소비자는 브랜드에 대한 호감과 충성도가 생기게 되고, 브랜드 또한 기업 이미지가 개선되거나 경쟁력을 확보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팬슈머, 또 다른 덕후가 되다

유독 소비자와 찰떡같은 케미를 보이는 브랜드도 있다. 브랜드발 이슈가 있는 곳이라면 아이돌 콘서트 가듯 달려가는 소
비자 팬덤을 확보한 기업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비자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브랜딩에 능숙하다는 것. 공식 서포터즈
나 앰배서더를 임명해 브랜드의 활동을 알리기도 하지만, 소비자 스스로 브랜드의 팬이 돼 막강한 서포터즈 역할을 수행
하도록 유도한다. 소비자를 자발적 서포터즈로 포섭하는 브랜드는 SNS상에서 퍼 나르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재밌는 캠페인, 동경할 만큼 멋진 사람들이 잔뜩 참여하는 힙한 이벤트 등 ‘나도 같이 끼여 놀고 싶다’라는 욕구를 자극하는 브랜딩을 선보인다. 이렇게 브랜드와 소비자가 함께 어울리는 과정에서 브랜드에 대한 관심과 호감은 밈(Meme)처럼 복제되고 확산된다. 결국 잘되는 브랜드는 소비자와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잘 안다는 얘기다. 배달의민족(이하 ‘배민’)은 소비자와 잘 놀기로 소문난, 소비자 참여형 마케팅에 특화된 브랜드다. 2019년부터는 떡볶이 전문가 시험도 생겨났다. 11월 11일을 떡볶이의 날로 정하고 최고 떡볶이 전문가를 가리는 ‘배민 떡볶이 마스터즈’를 진행하기도 했다. 팬데믹 시국이라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찹찹’ 음식 씹는 ASMR를 듣고 무엇을 먹는 소리인지 맞히는 ‘ASMR’ 유형, 떡볶이 매장에서 주문하는 외국인이 추가한 토핑은 무엇인지 맞히는 ‘영어 듣기’ 유형 등 오직 떡볶이에 관한 45개 문항이 펼쳐졌다. 배민의 유쾌한 캠페인은 이미 ‘배달민족’의 후예, 즉 배민 덕후라면 누구나 즐기는 놀잇거리로 자리매김했다.
소비자가 아닌 브랜드로, 하비프러너 돈, 명예, 성공보다는 재미와 보람을 추구하는 요즘 세대의 공통된 꿈은 어쩌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취미로 돈을 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이 어려운길 위에서도 독보적으로 빛나는 사람들이 바로 덕후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전문적으로 기획해서 사업으로 확장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하비프러너 (Hobby-preneur)라고 부른다. 특히 요즘은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 시대.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취미의 중요성은 커지고, 그만큼 취미 생활에 열과 성을 다하는 덕후도 많아지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취미를 사업적으로 발전시켜 수익을 창출해내는 하비프러너가 되는 것이다. 하비프러너는 창업을 위해 막대한 자본을 준비하고 대기업이나 컨설팅 업체에서 제공하는 업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이 즐기던 취미를 창업으로 연결한다. 특히 요즘 같은 모바일 중심 시대는 블로그나 유튜브, 인스타그램 같은 SNS 채널을 통해 취미 활동의 결과물을 보여주고 판매할 수 있는 통로도 많아졌다. 


하비프러너로 성공하기

하지만 제대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하비프러너가 되기 위해서는 그냥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뛰어넘은 그 무언가가 있
어야 한다. <덕후의 탄생>이라는 책의 저자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몰입’이라고 말한다. 이 몰두의 시간을 통해
전문가가 될 수 있고, 또한 삶이 더욱 행복해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옛 어른들의 말 중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할 때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 지를 단숨에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명언이 아닌가 싶다.


덕후가 사는 세상

<덕후의 탄생>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만의 성공 법칙이 보이는 듯하다. 요즘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핫한 지휘자 진솔(대구MBC교향악단 전임 지휘자, 플래직 대표)은 10대의 대부분을 게임과 함께 보냈다. 학교에
서는 왕따, 집에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외동딸이던 그녀에게 게임은 유일한 피난처였고, 위로였으며 친구였다. 그 시절
그녀 곁에는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기댈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처절하게 외로웠고, 그럴수록 게임에 빠
져들었다. 덕분에 학교에서는 ‘쪼렙(‘쪼다 레벨’의 줄임말로, 실력이 없다는 의미. 또는 초보 게임자)’이었지만, 게임에서
는 ‘만렙(최고 레벨)’이었다. 진솔은 게임에서 처음으로 성공을 경험했고, 게임에서 만난 친구들을 통해 사회성을 키울
수 있었다. 진솔은 지난 2017년, 세계 최초로 게임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회사를 창업했다. ‘스타크래프트’로 유
명한 세계적 게임 회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3년짜리 공연 전속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휘자이자
게임 덕후니까 오케스트라와 게임 연주를 결합해보자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이다. 콧대 높은 블리자드 엔터
테인먼트와의 계약에서 게임 덕후로서 경험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물론이다. 진솔뿐만이 아니다. 중2 때 종이비행기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있다. 그는 TV에서 켄 블랙번이라는 아저씨가 종이비행기를 오래 날려 기네스 기록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렸고, 언젠가는 자신도 세계기록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심심하면 종이비행기를 접었고, 마음이 답답하면 종이비행기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철사를 넣어 날개를 휘어보기도 하고, 앞뒤 방향을 바꿔보기도 했다. 해볼 수 있는 실험이란 실험은 다 해본 것. 처음에는 어린애 같다고 놀리던 친구들도 그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간 그는 현재 스스로를 ‘종이비행기 날리기 국가대표’로 브랜딩 하면서 이색 스포츠 마케터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제 대회에 참가하면서 이색 스포츠 시장의 잠재력을 꿰뚫은 덕분이다.


덕후, 작은 변화로 만든 큰 물결

시간은 매일, 조금씩 흘러가고 변화한다. 처음에는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부정적 시선을 보내던 덕후들이 세월이 흘러 새
로운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은 참 재미있지 않은가. 덕후가 팬슈머가 되고, 성공적인 하비프러너가 되는 데
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상을 위해 대단히 큰 발견이나 발전을 해낸 것은 아니다. 그
저 그들이 사랑하는 분야에서 소소하고 작은 움직임을 보여줬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
이 관심을 둔 브랜드나 인물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과 애정이 있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작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작기에 소중한 일. 그 걸음걸음에 당신도 한 사람의 덕후가 되어 동참해보는 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라면 우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찾아보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인생은 더 행복해질 것이다. 

EDITOR 배수은 PHOTO UNSPLASH REFERENCE <덕후의 탄생>(김정진 지음, 덴스토리)

 

위 글의 출처는 우리은행 TWO CHAIRS웹진 VOL.51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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