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인생 후반전은 내 삶을 어떻게 가꾸는지도 중요하지만, 자녀나 손주들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 것인지도 매우 중요한 시기다. 단순히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증여세를 덜 내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이치나 자본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선 그리고 좋은 가치관과 훌륭한 재무 습관을 정립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자녀에게 정말로 물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짚어본다.
“당신의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유럽 명가 발렌베리 가문의 독특한 가풍 얘기를 하고 넘어가자. 발렌베리 가문은 지난 160여 년간 5대째 경영을 세습해온 스웨덴 명문가다. 이 가문은 유럽 최대 규모의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와 통신 장비 회사 에릭슨 그리고 은행과 방위산업체 등 19개의 기업을 거느렸다. 이들 계열사가 차지하는 시가총액이 스웨덴 전체 주식시장의 약 40% 수준이다. 그런데 이 가문의 상속자 중에는 세계 부자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없다. 법인이 거둔 이익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이익의 85%를 세금으로 낸다. 게다가 공익 재단을 통해 과학기술 연구를 지원하고 대학교나 도서관, 박물관 등 공공사업에도 많은 투자를 한다.
발렌베리 가문의 원칙, 상속받고 싶으면 자립하라?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 세습 원칙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로 선정되려면 매우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모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로 복무해야 하며, 외국에서 MBA 공부를 한 다음 국제 금융가에서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이 과정을 거쳐 선발한 2명이 회사의 금융과 제조 파트를
각각 책임진다. 이는 창업 2대주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켜온 원칙으로 자립심과 책임감을 기르고, 노동의 가치를 직접 체득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 등 다양한 가치를 몸소 체험하라는 취지다. 거액의 자산을 고스란히 물려주는 게 아니라 돈을 대하는 올바른 관점과 태도를 물려주는 것이다.
외국의 유명 자산가 사이에서는 이런 사례가 비교적 많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가 대표적 케이스다. 그는 초등학생 딸이 최신형 휴대폰을 사달라고 졸랐으나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그 이유에 대해 “너무 쉽게 무언가를 얻게 되면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월마트 창업주 샘
월턴은 자녀들에게 적은 용돈만 주고 마트에 나와서 일을 도와 용돈을 벌도록 했다. 워런 버핏의 자녀는 “거액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큰돈을 물려받아도 어차피 기부할 것”이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연 소득이 600억원에 달하는 스타 셰프 고든 램지 역시 “아이들을 버릇없는 응석받이로 키우지 않기 위해 재산을 절대 대물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고든 램지는 비행기를 탈 때 아이들을 일등석에 태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이들은 일등석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힘든 곳에서 일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교육관이다.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세계적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 힐튼 호텔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줄 몰랐다”고 말해 구설수에 오른 것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자산가에게는 금고 속 보석보다 마음속 재무 심리가 더 중요하다
한국에도 돈에 관해 자녀들을 엄격하게 교육하는 부자가 있었다. 대표적 예가 경주 최씨 집안이다. 경주 최씨 가문은 아래와 같은 여섯 가지 가훈을 토대로 자녀들을 가르쳤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마라.
셋째,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여섯째, 며느리에게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세계적 자산가들의 자녀 교육 사례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오랜 노력으로 부를 쌓은 자산가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따지고 보면 답은 간단하다. 부모 세대가 이룩한 결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지금보다 나은 방향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단순히 재산을 상속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런 방향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자산가들이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을 대하는 올바른 관점과 시각이다. 자산가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투자에는 과감하고 소비에는 신중하다.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미처 감수하지 못하는 위험에 과감하게 투자함으로써 경제적 성공을 이뤄본 경험이 있다. 반면 남들이 충동적으로 돈을 쓸 때 효과적으로 재산을 모으면서 자산 규모를 불리는 데 관심이 많다. 그렇게 모은 재산을 남들과 잘 나눈다. 정리하면 잘 벌어서 아껴 쓰고 효과적으로 모아 풍족하게 나눈다.
자산가들은 돈을 어떻게 벌어서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생각이 있고, 대개 그것을 위와 같이 실천한다. 여기서 언급한 자본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 돈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 또는 믿음을 전문가들은 ‘재무 심리’라고 부른다. 이런 심리는 무의식 속에 존재하므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데, 돈을 벌어 자산을 모으고 불려서 나누는 모든 과정에 깊이 관여한다.
현명한 부모는 자녀에게 돈 대신 지혜를 상속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심리가 보통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유전자의 문제라기보다는 가정환경에서 평소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성격처럼 자리 잡기 때문이다. 부모가 평소 경제나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자녀의 재무 심리가 형성되는데, 그 심리가 자녀의 경제관념을 결정한다. 돈은 사람을 게으르고 방탕하게 변질시키는 못된 습관이 있다.
힘들게 돈을 벌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 이 돈의 위력에 빠지면 사회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행동을 할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부모는 평소 성실하고 건전한 활동을 통해 값진 노력의 대가로 자산을 불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자녀가 계획에 따라 소비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도와야 한다.
무조건 절약을 강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경제 지식과 금융 정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도록 돕고, 자본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 효율적인 자산 관리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기본적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 여기에 나눔을 습관화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돈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자산가 사이에서는 이를 위한 재무 개인 과외 서비스를 받는 사람도 있다.
투자처 정보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재무 습관을 기르고 그 습관을 자녀에게 그대로 물려주자는 취지다. 한국재무 심리센터 등에서 관련 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재무 인성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개발한 재무심리검사 프로그램(NPTI)을 활용해 개인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고, 최근 캐나다 크리스천 칼리지와 공동으로 재무심리학과 석·박사과정을 개설해 재무 테라피스트를 양성하는 등 돈에 대한 바른 습관과 태도를 갖추는 데 필요한 활동을 돕는다.
재무 테라피스트는 기존의 자산 관리사 또는 PB와 조금은 다른 개념이다. 자산을 늘리거나 절세 노하우 등의 재무 설계를 다루는 전문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산 관리사에 심리 상담사와 라이프 코치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재무에 관한 습관과 심리를 교정해준다. 국내에 재무 테라피스트 개념을 처음 도입한 정우식 박사는 “50대 이상은 본인의 재무 심리 개선뿐만 아니라 자녀를 위한 재무 테라피가 필요하며, 유아기와 청소년기에는 재무 인성 개발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참고로 이곳의 고객 중 30% 정도가 고액 자산가이며, 방문자는 대부분 자녀 세대 자산 이전을 앞두고 종합 재무 테라피를 받는다.
우리은행 TWO CHAIRS웹진 VOL.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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